뉴질랜드에서 생활하다 군복무로 입국, 이후 골프티칭 자격증까지 취득했지만 코로나로 계획이 틀어져버려...

성공사례

뉴질랜드에서 생활하다 군복무로 입국, 이후 골프티칭 자격증까지 취득했지만 코로나로 계획이 틀어져버려...

이장헌법무사 0 107
관할법원 : 부산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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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름 **

 

2.월 평균수입 : 1,638,540

 

3.총 채무액 : 111,996,476

 

4.월 변제금 : 541,841

 

5.변제횟수 : 36

 

6.변제율 원금의 18%



신청인은 부산에서 태어난 권**으로 현재는 어머니와 같이 부산에서 살고 있습니다. 원래는 부모님과 동생, 이렇게 4명이서 살았지만 아버지가 중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동생은 현재 미국에서 결혼하여 오클라호마에서 조그마한 도넛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단칸방 달동네에서 생활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 부재로 방황하던 시기에 사촌누나가 뉴질랜드에 이민을 가 있는 터라 어머니는 저를 뉴질랜드로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사망보험금, 어머니가 30년째 운영 중이신 횟집으로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생활비를 매달 보내주셨지만 매달 부족했습니다. 동생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뉴질랜드로 넘어왔습니다. 한국에 한번도 나오지 않은 채 방학 때면 양털이불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아왔습니다. 당시 뉴질랜드 관광이 뜨고 있는터라 관광객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나온 곳은 유황온천으로 유명해서 관광객들이 무조건 들리는 코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방학 때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한국 들어오는 경비로 썼습니다. 솔직히 저는 유학생활이 그렇게 좋은 기억으로는 남아있지 않은 거 같습니다. 친구들한테 매일 얻어먹고 먹고 싶은 거 사먹지도 못하고 동생이랑 힘들었던 기억만 많이 남아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매형 따라 골프치러 갔는데 한번 연습으로 쳐봐라고 해서 그냥 재미로 몇 번 쳐봤는데 한인 한분이 말을 거시면서 혹시 골프해 볼 생각없냐면서 물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한인회장이셨고 유소년들 운동선수로 키우는 걸 상당히 좋아하신다고 집으로 초대해 주었습니다. 나를 골프선수로 키우고 싶다는 말에 어머니께 말하였고 심하게 반대를 하셨습니다. 매형은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 스폰을 써주신다고 하니 한번 연습을 해 봐라고 했습니다. 여름방학 2달의 기간 동안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연습장, 필드, 집 이렇게 반복을 했습니다. 그 당시 세리키즈가 시작되고 있었던 시기라 골프 유학생들이 엄청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늦게 시작한 저는 남들보다 연습을 2배로 하였고 그게 역으로 부상으로 연결되어 늑막염에 걸리게 되어 선수생활에도 지장을 줄 수 있다기에 1년 정도 골프를 배우다가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저는 관광전문대학교에 진학을 하여 1학년 1학기를 다니다 집안생계가 어려워져 군대를 가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군대 전역 후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가서 영주권을 받아보고 싶어서 부족 직업군 중에 하나인 목수 일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목수 일을 1년을 했는데 뉴질랜드는 매해 항상 영주권법이 바뀌는지라 가고 나서 1년 뒤 1월 1일에 부족 직업군에서 목수가 제외되었습니다. 저는 하는 수 없이 주방일을 배워 아침엔 스시집 저녁에 한국음식점에서 주방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투잡을 1년 이상 하니 돈도 잘 모였고 별로 걱정 없이 살았는데 비자문제가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를 뉴질랜드에서 살지 않겠다 라고 결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 영어책 영업, 벨브회사 이렇게 두군데서 일하고 동생이 해운대에서 커피랑 토스트집을 같이 한번해 보자고 해서 그렇게 저의 자영업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새벽에 동생이랑 오피스텔에 전단지를 붙여가며 토스트를 열심히 팔았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항상 계획해 오던 사업아이템이 있었는데 어머니한테 말씀드렸더니 은행에서 대출도 받고 어머니가 조금 모으신 돈으로 동생이랑 저에게 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동생이랑 저는 서면에서 조그만 조개찜 집을 오픈하여 회, 해산물, 조개찜 등등 이렇게 여러 가지 팔았습니다. 운이 좋게 처음부터 장사가 너무 잘 되었고 2년 정도 운영을 하다가 돈이 어느 정도 모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 꿈이 하나 있었는데 외국에서 장사를 해보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동산에 가게를 팔고 동남아에서 장사를 해 보려고 필리핀, 태국, 일본 을 중점으로 아이템도 찾아보고 아주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태국 방콕에 지인의 소개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권리금과 월세가 많이 비쌌지만 저랑 제일 친했던 형님께서 같이 투자를 하셔서 둘이서 총 2억 정도 들여서 가게를 오픈하였습니다. 직원도 부산에서 제가 믿고 쓸 수 있는 2명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제가 생각했던 것이랑 너무너무 달랐습니다. 월세는 비싸고 방콕 시내이다보니 집월세도 비쌌고 생활비가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나갔습니다. 그렇게 형님이랑 저랑은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가게가 망하는 걸 눈으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아놓은 돈은 다 날렸고 어떻게 일어날까하는 생각만 하고 살아야 하는지 앞이 막막했습니다. 동업했던 형이 부산에서 공차라는 음료가게 하나와 해운대에서 브런치 가게 두 개를 운영 중이었습니다. 제가 놀고 있으니 형이 해운대 브런치 가게가 현재 수익이 많이 나지 않으니 한번 운영해보라며 인수비용은 돈을 벌면 그때 조금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시 해운대마린시티에서 브런치 가게를 운영하였지만 잘 되지 않아 매출대비 월세랑 운영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손실이 났습니다. 그렇게 1년을 손실이 나면서 가게를 처분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당시 너무 힘들었지만 동생은 힘들게 지내고 있던 터라 미국에 가서 바닥부터 일해 보겠다고 말하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태국에서 동업했던 형이 3년 전부터 골프를 배우면서 저보고 다시 골프쳐 볼 생각 없냐라고 금전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던 터라 안친다고 했지만 지원해주겠다며 한번 다시 쳐봐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 쳐보니 어릴 때 쳐봤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금방 실력이 올라와 유에스 티칭 프로에 도전하여 1년 만에 티칭프로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자격증은 미국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것이니 형도 빨리 들어와서 같이 도넛집하면서 같이 지내자라는 말에 일단 돈이 없어서 당시 지인가게 공차에서 매니저를 하고 있어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일단 1억 정도는 있어야 가게 하나를 할 수 있다고 하여 이리저리 대출을 받고 미국 가서 열심히 일하면 매달 갚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공차를 그만두고 지인이 마닐라에서 여행사를 운영을 하여 골프관광가이드로 아르바이트하면서 조금씩 용돈벌이도 해가며 지냈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코로나가 터지면서 계획했던 20204~6월 사이에 미국에 가려고 했던 모든 계획이 다 무너지면서 주식도 조금씩 배웠지만 마이나스가 나면서 수익은 없고 달달이 나가는 이자 원금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 처지까지 왔습니다. 한순간 나의 어리석은 생각과 선택으로 인해 현재는 생활조차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높은 금리의 대출들이 이렇게 어려운 생활까지 이르게 할 줄 생각을 못했던 갓 같습니다. 현재는 지인소개로 골프스튜디오에서 골프레슨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일찍 아버지 역할을 제가 하려고 했고 어릴 때 가난함이 싫고 그래서 열심히 이것저것 하려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 같습니다. 이제는 결혼도 해야 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우리 어머니 동생 앞에 떳떳하게 보일 수 있게 다시 한번 눈물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