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한 사업마다 망하고 다시 취업하고를 반복하다가 큰 맘먹고 시작한 사업이 이번엔 코로나로 인해....

성공사례

시작한 사업마다 망하고 다시 취업하고를 반복하다가 큰 맘먹고 시작한 사업이 이번엔 코로나로 인해....

이장헌법무사 0 461
관할법원 : 부산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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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름 **

 

2.월 평균수입 : 1,500,000

 

3.총 채무액 : 51,345,633

 

4.월 변제금 : 470,000

 

5.변제횟수 : 60

 

6.변제율 원금의 62%



신청인은 부산 영도에서 1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입니다. 부모님은 조그만 자영업을 하셨고 어릴 적 저희 가정은 다복하고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주식을 하시게 되시면서 모든 것을 다 날리게 되었고 저는 고등학교 때 항상 불안한 사춘기 시절을 보내며 공부도 어렵게 하면서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학 갈 형편이 안 되었지만 부경대 **학과에서 학자금대출을 받아가며 어렵게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28살 졸업하던 해 현재의 아내인 여자친구가 임신을 하였고 아무것도 없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장모님은 그 당시 건강기능식품(허벌라이프) 사업을 하고 있었고 저는 전기자격증을 취득하여 취직하려고 하였지만 장모님의 권유로 아내와 같이 건강기능사업을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신혼집인 오피스텔은 양가 부모님의 도움으로 분양받게 되었고 대출을 받아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헬스장 안에서 매장을 운영했었는데 헬스장이 망하면서 헬스장에서 나오게 되었고 장모님이 계신 동네로 이사를 하여 장모님 가게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입이 점점 줄어들어 신혼집을 팔아보려고 하였지만 매매가 잘 되지 않아 결국 전세를 주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부부는 장모님 댁에서 같이 살게 되었고 열심히 일했지만 건강기능식품 기업 매출 하락과 루머에 시달리면서 한국허벌라이프의 매출이 떨어지면서 저희도 어쩔 수 없이 또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카드 빚은 계속 늘어나 힘들어지는 바람에 마침 아내의 이모부님께서 일용직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저는 빚을 갚기 위해 통영으로 토목공사를 하러 갔습니다. 열심히 해서 빚을 갚아 나가며 현장에서 우수근로자로 상도 받을 정도였습니다.

 

가게는 아내가 맡아서 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 첫째 출산과 더불어 둘째가 태어나면서 사업에 신경 쓸 수가 없었습니다. 오피스텔을 팔려고 급매로 분양가 보다 싸게 내놨지만 집이 팔리지 않아 정말 너무 힘들었습니다. 통영에 가 있는 동안 아내가 장모님 댁에 살면서 주말부부를 하던 차에 둘째가 태어나면서 아래층 소음으로 시끄럽다고 해서 급하게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아내의 남동생이 갑자기 결혼하게 되어서 장모님도 더 이상 우리부부를 도와 줄 수 없는 상황이였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단칸방 월세방으로 이사를 하고 통영공사가 끝나 돌아와 취업을 하려고 알아보던 찰나에 아내가 아는 사람이 코인을 사서 대박이 났다고 하여서 아내가 우리도 잘 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저 몰래 대출을 받아 투자를 했고 2천만원 빚으로 떠안게 되었습니다. 정말 제 인생에 아내를 잘못 만난건지 제 인생에 운이 없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빚을 갚으면 또 빚이 지고 죽고 싶은 날들이 계속되었지만 장모님께서 같이 해보자고 가족이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또 한번 큰 각오를 하고 장모님 가게에서 점핑 센터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잘 되었지만 점핑이라는 것을 제가 잘 몰라 운영 미숙과 비슷한 가게들이 많이 생기면서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카드 빚이 늘어나고 부채도 늘어나고 또 생활비에 시달리면서 빚이 커져갔습니다. 가장이 되어서 이렇게 있을 순 없단 생각에 저는 급하게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다 울진 원자력발전소에 포설 작업하는 일용직을 가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해서 빚도 갚고 원자력발전소에 취업하자는 목표를 재설정하였습니다. 그때 아내가 월세 만기가 되었다고 마침 LH전세임대대출이 된다고 해서 보증금이 작고 월세를 많이 내던 집을 이사하면서 전세임대 대출에도 본인 금액 10%가 필요했고 어쩔 수없이 카드론 받고 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울진에서 열심히 포설을 하면서 빚을 갚자는 목표로 아기들이 보고 싶고 아내도 보고 싶었지만 가장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 울진원자력발전소에서 취업 자리가 생겨 페기물 처리반으로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열심히 자리 잡아서 가족들을 데리고 올라와야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혼자 사는 원룸 월세에 기름 값을 빼면은 빚을 갚기는 켜녕 현상 유지만 되는 정도였습니다. 아내도 아기들이 조금 커서 어린이집에 보내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상황이 왔고 멀리 떨어진 저희는 우울증이 왔습니다.

 

그때 장모님께서 다시 해보자 이제 아내도 함께 일할 수 있으니 조금만 서로 도우면 가족 사업이 발전할 것이라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양한 사회생활도 경험했기에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함께 다시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열심히 재기를 하면서 아내도 열심히 하고 있고 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실수는 다시 하지 않고 장모님의 점핑 센터를 운영했고 전보다 나은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예전 빚이 너무 많아 힘이 들며 고금리로 돌려막다가 터져있는 빚들이 제 자신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채권자들의 독촉 전화에 집에 찾아온다는 말까지 들으니 제가 너무 힘들어집니다. 잘 살아보려고 가족과 함께 잘살고 싶어서 했던 사업이 이렇게 힘들어지니 일어서면 또 무너지고 저의 부족함과 아내의 어리석은 생각과 선택으로 인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서 높은 금리의 대출들이 저를 구렁텅이로 집어넣는 늪이 되었습니다.


많은 생각과 고심 끝에 개인회생을 결심하고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하며 서로 밤새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바뀐 저희가 이루어낸 결실로 좋은 결과가 나오고 있는데 하루 하루 빚으로 물거품이 되는 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지금 이 진술서를 쓰고 있는 중에도 코로나의 영향으로 가게를 오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는 기회와 주시기를 간곡히 바라고 부탁드립니다. 앞으로는 정말로 열심히 살고 요행을 바라지 않고 나의 가족과 또 나 자신을 위해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