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디스크로 일을 그만두고 포교원을 만들어 운영하였으나 코로나로 인해 폐업하게 되어....

성공사례

허리디스크로 일을 그만두고 포교원을 만들어 운영하였으나 코로나로 인해 폐업하게 되어....

이장헌법무사 0 1,189
관할법원 : 창원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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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름 **

 

2.월 평균수입 : 1,500,000

 

3.총 채무액 : 57,362,748

 

4.월 변제금 : 445,684

 

5.변제횟수 : 48

 

6.변제율 원금의 40%




신청인은 부산 남구 용호동에서 배를 타는 아버지, 가정주부이신 어머니 밑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난 박**입니다.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타셔서 몇 년에 한번 집에 오셨고 집에 오시면 한달 정도 머무르셨는데 술, 담배를 워낙 좋아시고 폭력적인 성향이 강했습니다. 배를 타시며 버는 월급은 모두 외국에서 탕진하셨고, 집에 오시면 어머니께 돈을 빌려오라고 소리를 치셨습니다. 내성적인 어머니는 돈을 빌려오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폭력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생활비가 없었기에 어머니는 신발공장에 나가 일을 하셨습니다. 월세를 못내서 쫓겨난 적도 있고 이모네에 얹혀 산 기억도 있었던 유년

시절이지만 성격이 밝은 탓에 크게 어려움은 느끼지 않고 밝게 자랐습니다어머니께 도움이 되고 싶어 신문배달도 했었고 오륙도에 배를 타고 들어가 쓰레기 줍는 일도 했습니다. 공부에 영 소질이 없던 저는 실업계에 들어가서 기술을 배우려 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대학도 진학하게되었습니다.

 

그 즈음 아버지는 술도 거의 안드셨고 배도 안타시고 부산에서 사시며 용접 일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도 마음의 안정을 찾아 저도 마음을 놓고 군입대를 했습니다그러나 전역 3개월 전 아버지가 암선고(임파선암)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이 어려워 보험같은 걸 들지 못했던 탓에 병원비가 많이 나왔고, 어머니는 살아계실 때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해드리고 싶다 하여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그 금액이 총 5000만원 가량입니다. 어머니의 노력에도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셨고 집안의 가장이 된 저는 제대후 학교를 자퇴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가진것도, 배운 것도 없던 저는 조선소가 모든 기술의 집합소라는 이야기를 듣고 조선소에 입사하려 하였으나 입사를 위한 건강검진에서 난청이 발견되어 그마저도 좌절되었습니다.

 

아버지 병원비로 빌렸던 금액 때문에 친척들과 지인들이 집에 자주 찾아왔고 어머니도 아파트 청소를 하시며 일을 하시는 와중에 제가 주저앉아 있을수는 없었습니다. 아는 형님의 권유로 **산업이라는 전기공사회사를 소개 받게 되었고 그곳의 검진은 조선소나 중공업보다는 조금 간략한 수준이라 입사를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난 아가씨와 인연이 되어 연인관계가 되었고 그 아가씨가 지금의 와이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20대는 현장에서 끊임없이 기술을 배우고 공사를 하고 기술을 배우고 또 공사를 하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10년 정도 어머니와, 여자친구(지금의 배우자), 저 이렇게 셋은 열심히 일했고 그렇게 모은 돈에 은행 대출을 받아 작은 빌라를 구입했고 동거한 여자 친구와 식도 올렸습니다.그제서야 조금 안정이 되었고 크게 가진 것 없어도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허리에 통증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고 정형외과를 다녀도 통증이 줄지가 않았습니다. 큰 병원에 가서 MRI 검사를 해보란 권유에 MRI를 해보니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이미 일어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발가락까지 저려 어떤 자세를 취해도 심한 통증이 있는 상태였습니다. 가족에게 알리면 걱정할 것 같아 홀로 허리수술을 진행하였고 그때부턴 현장 일을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현장 일 특성상 무거운 것도 많이 들어야하는데 뭘 들 수가 없었고 결국 부산 집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사람도 회사에 일이 생겨 실직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님은 계속 아파트 청소를 하였으나 어머님의 수입으로 저희 세 가족이 생활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모아둔 돈이 별로 없었기에 조금씩 대출을 받아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허리 수술이 잘못된 건지 자고나면 계속 허리가 아파 취업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고 결국 2년 정도 재활 치료를 받으며 일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병원비는 병원비대로 나가고, 생활비는 생활비대로 나가며, 대출 이자가 많아지고 카드로 계속 돌려막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그러다가 아는 형님의 권유로 포교사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찰에 파견되어 불자님들에게 법문도 하고 교리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큰 벌이는 안 되었지만 보람된 일을 한다는 생각에 즐거웠습니다꾸준히 하다보면 좋은 날이 있겠지 하며 일을 했지만 워낙에 작은 벌이였고그동안 쌓아둔 빚은 많았기에 버는 게 전부 그간의 대출 상환하는데 다 쓰이는 지경에 이르렀고 생활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대출을 더 받아 생활을 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더 수입을 올리기 위해 제가 포교원을 개업하자 결심했습니다.

 

포교원은 불교 대학 같은 곳이라 불자님들이 많이 오셔서 시주도 받고 해야 운영이 되는 곳 입니다. 제가 포교원에 상주하며 불자님들에게 불교 공부도 시켜드리고 사찰에 위패 같은 것을 모실 때에는 사찰에 모시고 가서 스님들께 제도 부탁하는 일을 했습니다. 제가 모시고간 불자님이 사찰에서 위패를 모시거나 시주를 하시면 제비를 조금 나눠주는 형태로 수익구조가 발생하는 형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운영하다보니 시행착오가 많았고 운영자금도 많이 없었던 터라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급격히 힘들어졌습니다. 코로나 사태 아래에서는 집합금지 명령이다 뭐다 하여 일단 사람들이 5~6명씩 모이는 것 자체를 꺼려하니 불자님들을 많이 모실수가 없어 결국 폐업을 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또 6개월 동안 수입이 없었고 대출금은 늘어나고 카드 값도 늘어만 갔습니다.

 

결국 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다시 새롭게 직장을 구해야 하는 입장이라 사찰들에 문의해 본 결과 포교원 경력을 인정받아 사찰 종무소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사찰이 급여를 그렇게 많이 주는 편은 아니지만 꾸준히일을 열심히 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은 채무를 갚아보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놈이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는 안주면서 살아왔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 상황은 정말로 채권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한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들 수 있도록 설법하는, 항상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포교사가 되겠습니다한 집안의 가장으로써 가족들에게도 행복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개인회생이라는 제도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