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동료 베트남 여성과 결혼하였으나 토토에 빠져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하여....

성공사례

직장동료 베트남 여성과 결혼하였으나 토토에 빠져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하여....

이장헌법무사 0 1,314
관할법원 : 울산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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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름 **

 

2.월 평균수입 : 3,945,951

 

3.총 채무액 : 127,069,709

 

4.월 변제금 : 1,623,605

 

5.변제횟수 : 36

 

6.변제율 원금의 49%



신청인은 경기도 이천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셋째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난 정**입니다. 위로는 네 살 위 누나와 한 살 위의 형이 있으며 제가 7살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잦은 사업 실패와 숱한 가정폭력으로 인해 제가 21살이 되던 해에 이혼을 하셨습니다. 이혼 후 저는 어머니와 형과 함께 살았습니다. 누나는 아버지의 잦은 폭력으로 고등학생 때 가출을 하였고 객지 생활을 하던 중 2002년 살해를 당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누나를 살해한 범인을 아직까지 잡지 못해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한 빚을 어머니께서 대신 갚아 나갔고 그로 인해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운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은 포기하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공사장, 홀 서빙 등을 하다가 군 입대를 하였고 군대에선 UN평화유지군으로 ***에 파병도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만기 제대를 하고 한 여자를 만나 7년 정도 사귀었고 4년 정도 동거를 했습니다. 양가 집안끼리 서로 왕래도 활발했기 때문에 별 일없이 결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 여자 친구가 자동차 사고를 내고 치료비와 합의금이 필요하다며 제 카드를 빌려달라고 하여 빌려주었습니다. 그 때 카드가 2개가 있었는데 합해서 6천만 원정도 되는 돈을 썼던 거 같습니다. 카드를 쓰고 갚고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관계가 조금 소홀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저는 어머니 집으로 들어와 생활했습니다.


 그러다 카드 회사에서 전화가 왔고 여자 친구는 카드를 터트리고 잠수를 탔습니다. 카드회사에 제가 쓴 돈은 아니라고 여자 친구를 찾겠다고 하였지만 카드회사에선 제 카드이기 때문에 제가 갚아야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제가 쓴 돈이 아니기 때문에 갚지 않았고 결국 저는 신용불량이 되었습니다. 신용불량으로인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6년 정도 신용불량으로 살면서 여자 친구를 찾아 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어머니와 형이 빚을 내어 제 신용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평범하게 생활을 하였습니다. 다만 제가 받은 월급의 일정 부분은 빚을 갚으며 생활하다 지금의 와이프를 만났습니다. 같은 회사 직원으로 베트남에서 취업 비자로 온 외국인이었습니다. 한국에 온 지 4년 정도 되었고 저랑 같이 일한지 1년이 지날 때 쯤 저한테 1천만 원을 줄 테니 가짜 결혼을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전 정중히 거절하였고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부탁은 하지 말라고 딱 잡아 말했습니다. 그러나 와이프는 그러면 자기는 불법이 된다고 만약 잡혀가면 베트남에 있는 식구들이 힘들어진다고 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도저히 거절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짜 결혼은 못하겠고 진짜 결혼을 하고 싶다면 해주겠다하고 하였고 그렇게 저희는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취업 비자 기한이 5년이 넘어가게 되었고 불법 신분을 풀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알아봤지만 벌금 빼고는 답이 없었습니다. 불법 신분일 때 잡히면 강제 추방을 당한다기에 먼저 혼인 서류를 작성하였고 임신을 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임신이 쉽게 되지 않아 병원에서 여러 처방을 받고 노력하던 중 2년이 지난 어느날 드디어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불법을 풀기 위해 출입국 사무소를 방문하였고 결국 벌금 2천만 원을 선고 받았습니다. 당장 큰 돈이 없었던 우리 부부는 출입국 사무소에선 둘이 결혼한 사실과 증빙 서류 등을 준비하면서 회사를 계속 다니기는 힘든 상황이었기에 전 퇴사를 하였습니다. 모든 서류를 제출하여 결국 벌금 4백만원을 지불하고 베트남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에 와서 지금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 아파트는 어머니께서 어머니 집을 담보로 대출 받아 전세 계약한 집입니다


회사를 몇 군데 거쳐 지금의 회사에 과장으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 사장님과 부서장과 함께 골프를 치러 갔습니다. 당시 전 스프린 골프 몇 번 쳐본 게 다였으나 사장님께서 골프를 잘 치는 직원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골프를 잘 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월급을 받아서 빚을 갚고 어머니와 와이프에게 생활비를 주고 나면 항상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빚이 늘어갈 때 쯤 토토를 조금씩 하면 용돈 벌이도 되고 재미도 있다는 친구의 말에 토토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몇 만 원으로 시작하였지만 점점 돈이 늘어 결국 몇 십 몇 백 만원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빚은 산더미처럼 늘어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대출을 내고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습니다. 제 사망 보험금으로 가족과 애들은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뒷산에 올라갔습니다.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나무에 목을 매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돈이 뭔지 왜 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야하는지 원망하면서 목을 맸는데 그때 지나가는 사람이 저를 발견하고 나무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아마 그때 그 사람이 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면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때 그 사람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자신도 죽으려고 한 적 있지만 살다보면 한 번쯤은 살만한 날이 온다고 그 말을 들으니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였습니다.

 

저는 항상 제 삶을 원망하고 돈 없는 저를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하는 거 다 해보고 죽자는 심정으로 이곳저곳 대출도 하고 토토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살고 싶어졌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도 지켜보고 싶고 제 아버지가 했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는 사람이 되기는 싫습니다. 제가 저지른 일은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다만 지금의 월급에서 대출금을 갚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조금의 짐을 덜어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