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5년간 빵 제과기술을 배워 부산에서 개업했지만, 2호점을 무리하게 오픈하여 빚의 수렁에 빠져....

성공사례

서울에서 5년간 빵 제과기술을 배워 부산에서 개업했지만, 2호점을 무리하게 오픈하여 빚의 수렁에 빠져....

이장헌법무사 0 1,426
관할법원 : 부산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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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름 ** 

 

2.월 평균수입 : 1,500,000

 

3.총 채무액 : 96,880,207

 

4.월 변제금 : 421,000

 

5.변제횟수 : 42

 

6.변제율 원금의 20%



 

신청인은 참으로 죄가 많은 사람입니다. 이제껏 법의 테두리를 넘지않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부족한 남편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저의 아내와, 못난 저를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라고 믿는 두 아들을 경제적 어려움으로 마음껏 

남처럼 살게 해주지 못한 못난 사람입니다어릴 적 저희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저는 할머니 손에 키워졌습니다. 이가 30이 

넘었을 무렵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신변을 정리하다 부모님이 애초에 혼인신고조차 하지 않은, 단지 동거인에 지나지 않았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여섯 살 이후로 얼굴조차 본적이 없고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정성으로 돌봐주시는 할머니 

덕분에 크게 엇나가지 않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며 평범한 소년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 하지만 '부모의 정' 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채 결핍이 가득한 채로 자란 저는 한 번도 행복한 가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더 더욱 그러한 삶을 동경하며 

살아왔습니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처럼 저를 아껴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저는 대전에 사시는 고모님의 댁으로 

옮겨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학업에 큰 미련이 없던 저는 고등학교 졸업후 바로 군대에 갔고, 제대하고 나니 남은 인생이 

막막해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지금 현재의 저를 있게 한 제빵인의 길로 접어들

게 되었습니다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으면 나 하나의 인생 정도는 충분히 꾸려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서울에서 제일 유명한 

제과점에 취직을 했고 거기서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4~5시간 잠을 자며 그야말로 빵에 홀린 듯 일을 

하는 재미로 살았습니다그때 처음으로 저의 미래는 밝게 빛날지도 모른다는 부푼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5년간 빵 기술을 배워 아내의 고향인 부산에 내려와 결혼을 했습니다한달에 하루를 쉬며 월급으로 100만원이 조금 못되는 

돈을 받았지만 언젠가는 내 이름을 단 빵집을 가지겠다는 희망 하나로 대부분을 저축으로 모아왔고, 그렇게 모은 돈과 대출금으로 

북구 금곡동에 직원 한명 없이 제과점을 개업하게 되었습니다손님들은 다행히도 제가 만든 빵과 케이크를 아주 좋아해주셨고 매출도

꾸준히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워낙 제품에 대한 욕심이 강했고 서울의 고급스러운 빵맛을 고집했던 미련스러움 때문에 고급재료를 

위해 투자되는 재료비가 높았던지라 매출이 높아도 생각만큼 수익은 충분하지못했습니다. 아들 둘을 낳고 키우며 생활비도 적지않게 

필요했지만 이것 저것 빼고 나면 겨우 유지만 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그러다가 무엇에 홀렸는지, 매장이 하나 늘면 수익성이 개선될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100% 대출금을 끌어다가 양산 신도시에 2호점을 내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직원도 두며 시작한 매장은 오픈 이래로 단 한번도 일 매출 10만원을 넘지 못했습니다. 10만원을 판다고 해도 

순 이익이 2만원 남짓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 무시무시한 속도로 적자가 누적되었습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니, **동에 오픈했던 

기존 1호점 또한 유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빚이 쌓이게 되어 재료비와 매장 임대료를 내기도 어려워졌습니다그렇게 6년을 이어온 

자영업은 큰 빚만 남긴 채 문을 닫게 되었고 빚 독촉 전화와 집까지 찾아온 금융회사 직원들을 이리저리 피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저질러 놓은 빚을 갚아보려 택배회사에 취직도 했었지만 한달만에 트럭에서 떨어져 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은 후 1년을 

꼬박 수입도 없이 놀아야 했습니다. 아내는 자신이라도 돈을 벌기위해 취직을 하였고 엄마 아빠가 집을 비운 사이 두 아들은 집을 지켜야 

했습니다유치원을 마치고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집에 가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저희 아이들은 서로의 작은 손을 의지하며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불꺼진 집으로 들어섰습니다그렇게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여도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고 집에 쌀이 떨어져도 

돈이 없어 마트에 가지 못할 만큼 어려워져만 갔습니.


저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하여 축복 같은 인생을 보내야 하는 세 사람을 곤궁한 인생으로 몰아가고 있는 저는 나쁜 사람입니다. 왜 이런 

시련은 나에게만 찾아오는 건지 잠시 하늘을 원망해보기도 했지만 그런 원망이 어떠한 문제를 해결해줄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려 주시고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부디 저희 가족이 새로운 희망을 가슴에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