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신 아버지와 전업 주부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4자녀 중 둘째로 태어나, 교원임용시험을 준비했으나...

성공사례

공무원이신 아버지와 전업 주부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4자녀 중 둘째로 태어나, 교원임용시험을 준비했으나...

이장헌법무사 0 1,830
관할법원 : 부산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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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름 : 정**

 

2.월 평균수입 : 1,893,458

 

3.총 채무액 : 57,455,177

 

4.월 변제금 : 839,142

 

5.변제횟수 : 36

 

6.변제율 : 원금의 65%

 



신청인은 부산 강서구 대저동에서 공무원이신 아버지와 전업 주부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4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총 8명이 같이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른 건 몰라도 자식들 교육에 있어서는 욕심을 많이 내셔서 4자녀를 무리하게 모두 대학공부까지

마쳐주셨습니다. 4명의 자식이 대학졸업을 하려다 보니 아버지의 퇴직금은 학자금으로 모두 소진하고 재테크나 노후자금을 따로 마련해 두지

못하셨고 가진 것이라고는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부산여자대학교(현 신라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실업계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사회 초년생 월급으로는

큰 돈이라 경제관념이 부족했던 저는 생활비로 50만원씩 매달 어머니에게 드리고 나머지 돈으로 보험과 적금을 들고 제 생활비로 사용했습니다.

기간제교사로 근무하면서 임용고시 준비를 하였고 학원비나 교통비도 제 월급으로 감당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노력의 부족이 가장 크겠지만

전공 공부의 특성상 매년 채용하는 교사의 수는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그 문턱은 제게 너무 높았습니다. 임용고시의 늪에 빠져 나오지도

못하고 기간제교사로 계약기간이 끝나면서 임시 교사 자리도 구하기 힘들어져 **구청에서 계약직 직원으로 단순 사무 보조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월급은 최저임금으로 그 전 월급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그러면서 어머니께 드리던 생활비도 대폭 줄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아버지와의

불화로 집을 벗어나고자 했던 저는 때마침 친구의 제안으로 경기도 중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기위해 서울 언니네 집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서울 강북에서 경기도 안양까지 왕복 4시간씩 걸리는 출퇴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2007년) 연말쯤 형부가 언니 몰래 아파트 전세금까지 빼서 주식에 투자했다가 전부 잃고 빚까지 생기자 우선 급한 불부터 끄지는 심정으로

적금과 카드론을 받아 언니에게 건넸습니다. 언니는 그 돈을 형부에게 건넸고 그 후 형부는 중국으로 출장을 가 몇달째 한국에 들어오지 않다가

다음해 언니에게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그 당시 언니는 형부의 배신감에 위자료도 받지 않고 경제력도 없었지만 부산으로 내려가 어린 조카를

양육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안양 고시텔에 방을 얻어 생활하였고 언니에게 건네 준 돈도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카드론은 부모님께 부탁을 드려 집 담보로

대출을 받아 갚았습니다. 서울에서 터를 잡고자 했던 저는 기간제 교사 자리를 알아보다 여의치 않아 초등학교 교무 보조로 일하는 등 혼자서 생활을

이어갔지만 월세에 생활비로 빠듯하게 지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편도염증이 너무 심해 혼자서 수술을 받았고 몸도 좋지 않은 데다 임용고시를

준비할 경제적 여건도 되지 않아 더 이상 서울에서 버틸 수 없어 2012년 말 부산에 내려와 건강을 회복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2013년 **구청 지적과에 기간제 근로자로 채용되어 일을 하였습니다. 이 무렵 막내 여동생이 웨딩샵을 운영하면서 직원의 임금과 관련업체 대금 결제를

위해 사채를 빌려 썼고 이자와 연체 독촉에 시달리는 동생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한 번 더 카드론으로 대출을 받아 동생에게 빌려주었습니다. 동생은

규칙적이진 않았지만 대출금을 갚아주었습니다. 이 후 막내 동생은 웨딩샵을 폐업하고 시부모님께서 융통해 주신 돈으로 제부와 함께 광안리에서 커피숍을

오픈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생 부부가 운영하던 커피숍은 매달 적자였고 신용이 낮은 동생과 제부는 일수까지 쓰게 되면서 그 빚은 제가 갚아 나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있는 돈 없는 돈으로 갚아나가다 제가 사용할 생활비도 빠듯해지게 되고, 연체과 독촉에 보험을 하나, 둘 해약해서 급한 카드 값과 카드론을

갚아 나가게 되었습니다. 2016년 초 자궁근종이 너무 크고 개수도 많아 절제술로 적출 수술을 받고 쉬고만 있을 수 없어 구직활동을 하던 중 지금의 직

(***자원봉사센터)에 취업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조금씩 드리고 제가 빌린 돈도 조금씩 갚아 가면서 생활해 왔습니다. 동생부부가 신용이 낮아

자동차를 구입할 수 없었고 저와 함께 공동명의로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해 제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명의를 빌려주었습니다.

처음 몇 달은 꼬박꼬박 차 할부금을 주더니, 본인들 일도 잘 안 풀리고 여기저기 돈을 빌린 곳이 많다보니 벌어도 본인들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없고 갚아야

할 돈이 더 많다 보니 몇 달 할부금을 갚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는 연체 전화에 시달리다 현금서비스로 급하게 막아보고 노후를 위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생명보험을 해지해 원금도 챙기지 못하고 빚을 갚았지만 한 번 늘어나기 시작하는 이자와 빚이 도저히 제가 전부 갚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언니는 혼자 고등학생인 조카를 키우며 워킹맘으로 따로 지내고 있고, 남동생은 어려서부터 심장과 장이 좋지 못해 3차례 수술을 하고 주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는 상황입니다. 막내 동생 내외도 어린 조카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어 부모님은 제가 옆에서 챙겨드리며 건사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지금 끊어내지 않으면 보다 더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는 사금융권 돈을 빌리던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연로하신 부모님께도 고통을 더욱 전가하게

될 것 같아 개인회생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제 경솔한 판단과 무지로 인한 결과에 깊이 반성하며 저로 인해 누를 입게된 카드사들과 사금융 업체에 죄송한 마음으로 최대한 제가 갚아나갈 수 있는

만큼 갚고서 이 늪을 빠져나올 수 있게 기회를 주십시오. 앞으로는 단순히 정에 이끌려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는 과오를 범하지 않겠습니다. 소비패턴도

바꾸고, 제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않으면서 성인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경제활동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정교사의 꿈을 접고

현재 재직 중인 직장에서 여러 직원들과 협력하여 열심히 일하고 건강도 조금씩 회복하고 있습니다. 또한 2년 연속 우수사원으로 뽑히는 등 제 능력을

높이 평가받고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터라 바닥으로 내려앉았던 제 자존감도 서서히 회복되고 있습니다. 사회의 일원으로 낙오하지 않고 꾸준히 성실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제게 기회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해외출국건은 모두 필리핀 보라카이를 방문한 것으로, 친구가 보라카이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습니다.(저가 항공권을 구입해 항공비만 사용했고,

친구가 표를 사주기도 했습니다) 저도 여기 생활을 정리하고(부탁을 끊어내지 못하고 끌려다니는게 힘들어) 나가서 살까 하는 생각에 몇 차례 방문하게

되었고, 차마 부모님만 두고 나갈 수 없어 명절 때만 잠시 친구집에 바람도 쐬고 휴식을 취하러 다녀왔습니다. (저희 집이 큰집이다 보니 명절에 친척식구들이

저희 집으로 오거든요. 그것도 불편하고 해서 겸사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