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 빚을 갚고 나니 이젠 카드 값이 문제였습니다

성공사례

사채 빚을 갚고 나니 이젠 카드 값이 문제였습니다

이장헌법무사 0 1,973
관할법원 : 부산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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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 : 정**

 

2. 채무액 : 64,728,188

 

3. 월평균소득 : 2,471,020

 

4. 월변제금 : 1,416,704

 

5. 변제기간 : 36개월

 

6. 변제율 : 원금의 80%

 




 

저는 부산 기장군 **면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집을 나가셨고 어머니는 항상 일을 다니셨기에 친할머니

밑에서 우리 3형제가 자랐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까지 육상을 하였습니다. 중학교 때 육상선수로 훈련을 하다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더 이상

운동을 할 수가 없었고 공부에도 취미가 없던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부산 기장에서 인터넷 선을 연결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서울로 취직이 되어 서울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서울에서 춘천에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현재 같이 살고 있는 동거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우리는 연애를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일을 하던 중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힘든 일을 할 수가 없었고 저는 현 동거인과 함께 고향인 부산 기장군 할머니 집에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도 집으로 돌아오시어 할머니, 아버지, , 동거인 이렇게 4식구가 같이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김해에서 직장을

다니신다고 큰 형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계시면서 매일같이 술을 드셨고 알코올 중독으로 여러 병원을 오고 갔지만

결국엔 혼수상태인 채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무렵 부산 사상구 **동에 있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출퇴근 길이 너무 멀어 부산 사상구 **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동에서

5년 살다가 지금 **동으로 이사오게 되어 6년째 살고 있습니다. **동에서 살때도 형편이 어려운건 매한가지였습니다. 100만원에 10만원 밖에

되지 않은 곳으로 화장실도 밖에 있었고 쪽방촌보다 조금 더 큰방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장인어른께 대출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장인어른께서 500만원을 살고 계신 아파트를 담보로 해주셨고 그 돈으로 지금 **동으로 이사오게 되었습니다. 매달 이자만 겨우 갚고 있는 상태입니다.

저 동거인은 알고 보니 결혼을 한번 실패한 사람이였고 딸아이도 한명 있었습니다. 딸아이는 **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밑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예전엔 제 명의로 휴대폰도 하나 못하는 상황이였고 장모님 명의로 휴대폰을 사용했습니다. 김장하러 동거인이 친정에 갔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LG에서 장모님 명의로 휴대폰을 하면서 신한카드를 만들면 휴대폰 값 할인과 포인트도 많이 쌓인다고 했다면서 지금 동거인이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럼 만들어라 허락을 했고 지금껏 신한카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카드 값이 이렇게 부풀고 점점 늘어날 줄은요.

사채 빚을 안겨주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채무를 매달 이자만 갚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카드 현금 서비스를 받아서 다 갚아버렸습니다. 사채 빚을

갚고 나니 이젠 카드 값이 문제였습니다. 대출을 받게 되었고 산와머니 대부이였습니다. 매달 카드 값을 갚았고 갚다보면 돈이 없고 또 현금서비스를

받고 도돌이표 같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매달 똑같았습니다. 그 후에 대출도 여러 곳에 받게 되었고 대출액만 9천 만원이 넘었습니다.

 

저는 동거인을 만나서부터 제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며 뭐든지 열심히 했고 지금 이 회사도 지금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동거인과 한평생 같이 살고 싶은 것이 제 희망입니다. 부디 저의 이 뼈저린 마음과 진심이 전해지길 빌고 또 빌어 봅니다. 카드 값만 갚으면 된다 싶어 대출을 여기저기 낸 게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선처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