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6개월이면 된다던 프로그램 개발이 늦춰지며 개발비용이 계속 들어감에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러~

성공사례

처음엔 6개월이면 된다던 프로그램 개발이 늦춰지며 개발비용이 계속 들어감에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러~

이장헌법무사 0 1,617
관할법원 : 부산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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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 : 이**

2. 채무액 : 141,877,026원


       

 

신청인은 밀양의 오지 산골에서 32녀 중 셋째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에 마산으로 이사를 오기까지 밀양에서 대부분의 유년을 보냈습니다.

큰형의 학업을 위해 온 가족이 마산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가난한 생활이 더욱 악화 되었고, 그 시절의 많은 어른들이 그러하셨듯이 장남의 성공에만

모든 가정의 힘을 모아 주셨습니다. 다행히 큰형은 당시 서울대 법대를 입학하여 우리 가정의 어려움이 곧 해결되겠지 생각하였지만, 계속되는 빈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막내 아들이었던 저는 중 3까지의 우수한 학업 성적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어렵게 진학한 고교 2학년에 학비를 납부하지 못해

19831학기 중에 결국 자퇴로 학업을 중단 했습니다. 17살의 저는 새벽에 신문 배달과 인쇄소, 잡화점 등지서 일을 하였습니다. 학업에 대한 미련 때문에

**대 학생을 만나 야학을 요청하게 되었고 뜻있는 대학생들과 함께 “*라는 야학을 설립하여 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의 노동자들 중 학업에 열망이

있는 노동자들과 같이 검정고시 준비도 하였습니다. 당시 우리 ‘*는 기성 학원보다 훨씬 높은 검정고시 합격률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직업훈련소에 시험성적 1위로 합격하고 19849월경 어렵게 입소하여 열심히 기술연마와 습득에 노력하였습니다. 직업훈련소의 추천으로

대기업의 계열사인 부산의 ‘**정밀에 입사하게 되었고 방산 특례업체였던 회사 덕에 그곳에서 병역필의 자격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회사 근무 중에 주경야독하여

대입검정고시도 최종 합격하였고, 연이어 1988년경 방송통신대학 전자계산학과 1기로 입학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아버님의 요양을 위해 어린 여동생만 학업을

위해 마산에 홀로 있게 되어 그 뒷바라지를 제가 하게 되면서 방송통신대학에서의 꿈을 접었습니다. 회사 근무시절에 결혼도 하고 단칸방에서 첫아이도 낳았습니다.

노사분규의 극심한 시절을 겪게 되었고, 생활고 탈피를 위해 퇴사를 하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생활을 지켜나갔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1995년경부터 약 3년간은 건설업체에서

일하면서도 주유기 수리업체에서 집중적으로 기술을 배우기도 하였고 1997년경부터는 지인 회사의 명의를 함께 공유하며 조그맣게 주유소 수리와 건설업의 사업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주유소 설치 거리제한 규제가 사라지면서 업계는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기도 했습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만큼 신뢰를 쌓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많은 거래처를 확보할 수 있었고 1999년에는 저의 이름으로 부산 연제구에 정식으로 주유기 수리업체 “** 엔지니어링이라는 업체를 허가를 내어 건설업을 겸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주유소와 부판점들이 많이 신규로 창업하던 시기였고, 많은 신뢰가 있었기에 사업은 안정적, 발전적으로 커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주유기의 메이저 회사들이

수입산 유량계와 제어 프로그램 등으로 고가의 주유기를 판매하는 것을 보고 그 동안의 경험과 전문 서적 등을 통해 익힌 지식을 바탕으로 주유기 제조업2000년 당시

부산, 경남의 유일한 허가 업체가 되며 확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산 금정구 **동의 유공압 부품 전문 업체이며, 그 분야 업계 최고 기술력을 가졌다던 "**산업"  사장님이

직접 유량계를 개발하다가 수차례 실패를 거듭하다가 기술력을 가진 저와 만나게 되면서 저는 기술력을 무상 제공하고 대신 실험용 유량계 30(싯가 1,200만원)를 무상제공

받아 유량계를 시험하기로 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완성되면 시중가 70%로 공급받기로 하고 개발에 뛰어들어 당시 온전한 유량계가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완전한 유량계를

개발하였습니다. 주유기의 핵심 부품은 거의 다 완성 되어 가는데, 비슷한 시기에 같이 진행하던 제어 프로그램은 처음엔 국립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전자학과 교수님 팀과

개발을 진행하면서 교수님쪽에선 PLC 타입으로 개발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시장상황과 맞지 않아서 전문개발업자를 알게 되어 그 분과 주유기 기판 설계 및 제어, 연산 프로그램

개발을 하게 되었고, 처음엔 6개월이면 만들 수 있다던 프로그램 개발이 유량계가 성응시험이 완료 된 시점까지도 개발이 안 되었고, 거의 매일 개발비 형태로 돈을 요구하여

거의 3년 동안을 포기 할 수도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어 개발비에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주유소 부판점 신축이나 수선공사, 주유기 수리나 시청 대행의 주유가 검정 등을 통해

수익을 창출해도 주유기 프로그램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약속을 수 백번 어기던 ”***씨를 찾아간 게 수십번도 넘었지만 번번이 거짓말에 속고 또 믿고

물러나는 세월이 2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그러던 중 주유소 업계 난립에 따른 부작용으로 업계 불황이 찾아 왔고, 부판 판매점 업계는 도시가스 공급 확대로 극심한 불황에 빠져 들면서 저의 사업체 전반에

엄청난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그래도 저는 직원들이 퇴사를 하고 하여도 주유기 프로그램만 완성되면 가격. 기술. 국산의 유지 경쟁력을 이유로 회복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갖은 돈을 끌어 모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사업이 이러한 어려움에 있기 직전까지는 주거래은행이던 부산은행의 VIP였을 정도로 신용도 좋았고, 2000년 하반기

무렵에 부산시 **행정과(당시 *** 교수님 겸 과장님이었던 듯)에서 조건이나 이자부담이 거의 없는 정책자금을 권했을 때도 그 돈을 다른 기업에 주라고 할 만큼 금전적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다보니 각종 신용카드 대출과 부산은행의 대출까지 받으며 직원들 임금 등과 주유기 프로그램 개발을 이어 갔습니다.

가정에는 초등학생 2명이 있는데도 생활비를 거의 주지 못하였고 당시 아내는 식당일, 노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습니다. 저의 경제난이 극심해지다 보니까 다툼도 잦고

서로가 지쳐 버린 가정생활로 인해 2003년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악으로 버티다 2003년 겨울 ”***에게서 최초 완성의 주유기 제어, 연산 프로그램 전자기판을 1장 받았고

시험에 들어갔으나 그 결과를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공장 소파에서 숙식을 하며 버텨가던 저는 2004년 초 부끄러운 사건으로 구속수감 되었고 20053.1 절에 출소 하였으나

모든 것이 사라진 뒤였습니다.

채권자들은 늘어나 있었고 구속기간 중 공장을 돌보던 수년간 일하던 직원이 수금하여 생활비로 사용도 하고, 급하고 무서운 채권은 갚고 그랬다고 하였습니다. 출소 후 살펴보니

공장은 관할 세무서에서 직권 폐업하였고 공장의 일부 비품과 설비는 울산소재 웅촌의 주유소 공터에 1년간 방치 되어 있어서 고철 이상의 가치가 없게 된 상태였습니다. 거래처

몇몇을 돌아다니며 추스려보려 했지만 그 단계는 훨씬 지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고, 출소 후 처음으로 할머님 기일을 겸해 본가를 찾아 갔지만 당뇨로 실명하신 아버님과 그 긴

투병에 거의 주검처럼 움직이시던 어머님만 뵙게 되었습니다. 할머님 제사를 모신 다음날 아침 아버님은 식사 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 버리셨습니다. 지금도 제 가슴에 남은

가장 큰 한 중 하나입니다. 저를 정리하고 추스릴 겨를도 없이 빚만 남겨 놓고 떠나신 아버님 탓에 거동도 제대로 못하시는 어머님만 산속에 홀로 남게 되셨고, 형제들은 다들 자신들의

생활속으로 돌아 가버리고, 저는 병중의 어머님을 간병하며 그렇게 산중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 동안 주소지는 여동생집인 부산 서구 주소지를 두었습니다. 산속에서 움막 생활을

하던 어머님을 위해 버려진 창고 철거 자재들을 이용해 샌드위치 판넬 중고 자재 등으로 어머님 기거하실 집을 조금씩 지어가던 2008년 초봄에 반신마비 등이 간헐적으로 왔지만

어머님 살 공간 마련이 급했기에 무시하고 계속 일을 하다가 얼마 후 뇌경색이 왔습니다. 밀양에서 치료가 안 된다고 하여 부산침례병원에 입원하였고, 수술을 권하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비용 걱정에 거부하고 약물 치료로 임했고, 천만다행으로 신체 활동이 가능케 되어 급히 퇴원하여 일상을 이어 가며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투약 관리로 몸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 후 어머님 모시며 밀양에서 품앗이 등으로 생계를 일부 유지 하였고, 2011년엔 부산 해운대 재송동의 주유소 신축 현장에서 약 3개월간 관리소장의 직을 맡아 잠시 생업을 이어가기도

하였습니다. 그 외는 대부분 밀양에서 어머님을 모시고 간병과 품앗이 등으로 생계를 유지 하였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실로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하며 살아 왔습니다. 두 번 다시는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 왔었지만 능력부족과 부족한 사회경험으로 오히려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201910월에 어머님께서 암진단을 받으시고 85세의 고령의 몸으로 부산고신대 병원에서 항암치료 중이시기도 합니다. 저 역시나 뇌경색이 발병하고, 품앗이 등으로 일상을 이어가며 언제든 죽을 목숨이겠거니 삶을 내려놓고 살아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의 암투병을 지켜보는 요즘에는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으로 제 삶을 조그맣게 새롭게 시작하고 싶습니다. 빚을 떼먹는 게 아니라 갚을 수 없는 현실로 인해 제가 선택 할 수 있는 새로움의 길은 이것 뿐인 것 같아서 국가와 채권자에게 한없는 죄스러움을 가지며 17년간의 빚을 재판장님께 대신 용서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가족 구성원의 일부가 되어 어머님을 제대로 봉양하고, 아이들에게도 못다 한 아비로써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게 허락 해 주시길 너무나 간절히 바랍니다. 기나긴 채권추심의 과정에서 ,삶을 내려놓고 살아가는 저에게 부디 기회를 단 한번만 허락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