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부산에서 화물차 2.5톤을 운행하시는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2남 3녀 중에 둘째면서 맏딸로 태어난 이**입니다.

성공사례

저는 부산에서 화물차 2.5톤을 운행하시는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2남 3녀 중에 둘째면서 맏딸로 태어난 이**입…

이장헌법무사 0 1,956
관할법원 : 부산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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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름 : 이**

 

2.직업 : *****

 

3.월 평균수입 : 1,300,000

 

4.총 채무액 : 34,356,621

 

5.월 변제금 : 393,301

 

6.변제횟수 : 36

 

7.변제율 : 원금의 41%


저는 부산에서 화물차 2.5톤을 운행하시는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23녀 중에 둘째면서 맏딸로 태어난 이**입니다. 어린 시절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행복하게 자랐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아버지는 간경화라는 병을 진단 받았고 그러면서 일을 못하시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생활비과 아버지 약값을 충당해야 했고 그래서 저는 많이 배우지 못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랑 저희 5남매 열심히 살다가 저는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만 살면 앞날이 괜찮은 줄로만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머니는 갑상선 병에 걸리셨고 그나마 빨리 알아 지금까지 살아계십니다. 어머니가 아파서 돈벌이를 할 수가 없었고 제가 큰딸로써 친정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전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고 저는 그 일로 이혼하고 혼자 살면서 조금씩 어머니랑 오빠에게 도움을 주면서 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 그때는 재혼이 그리 힘든지 모르고 했습니다. IMF 시절이라도 열심히 일해서 시집에 남편에게 시숙에게 돈을 벌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하기 시작했고 더는 살기가 힘이 들어 제가 나왔습니다.

제 여동생이 정신지체 장애인인데 여동생도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딸과도 같이 못살고 있었습니다. 보육원에 있는 여동생의 딸을 데리고 와 동생이랑 저랑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조카가 성장하면서 저랑 같이 못살겠다고 해서 저는 다시 빈손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뒤 오빠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엄마의 약값이랑 병원에 들어가는 큰 돈을 제가 다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엄마 보험도 가입해서 쭉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에 저는 우울증도 겪었고 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의 권유로 여행도 다녀와 봤습니다. 저는 낮에 일하고 저녁에 시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열심히 살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빚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벌어서 살아보자 다짐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낮에 벌어도 그다지 많이 벌지 못해 계속 어렵다보니 카드 대출도 하고 보험도 대출도 하였습니다. 힘든 시기에 벌 수 잇는 돈은 점점 줄어들었고 빚은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제가 돈이 생길 때도 없고 해서 이렇게 염치없지만 개인회생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양심껏 살면 되는 줄만 알고 이 나이가 되도록 앞만 보고 살았지만 지금 이 순간 참으로 답답함이 많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부디 조금이라도 짐을 덜고 남은 인생 더 열심히 희망을 갖고 살아갈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엄마의 남은 인생 올해 85세이시면서 온갖 약은 다 드시면서 심장이 안 좋아 힘이 들지만 제가 끝까지 지켜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더욱더 성실하게 아끼면서 살아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절약하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꼭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