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 출소 후 내리막길 인생에서 개인회생으로 절호의 기회 얻은 사레

성공사례

교도소 출소 후 내리막길 인생에서 개인회생으로 절호의 기회 얻은 사레

이장헌법무사 0 3,129
관할법원 : 부산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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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름 : 김**

2.직업 : 카***

3.월 평균수입 : 1,520,314원

4.총 채무액 : 212,020,800원

5.월 변제금 : 496,109원

6.변제횟수 : 36회

7.탕감금액 : 194,160,876원

8.변제율 : 9%


저는 부산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건설 관련일을 하셔서 다른 지방에서 일을 하시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어머니 혼자서 우리 3남매를 키우셨습니다. 부산**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99*년 2월 졸업과 동시에 부산 서면에 본사를 두고 있는 **상호신용금고에 취업을 하였습니다.

직장 생활은 평범하게 성실히 하였으며 199*년 11월 군입대를 하였습니다. 방위병으로 18개월 정상 복무 후 소집해제 되었으며 소집 해제 후 **상호신용금고에 199*년 복직을 하였습니다. 1997년 IMF가 왔고 많은 직장인들이 정리 해고되는 불행이 있는 한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다닌 **상호신용금고는 위기를 잘 극복하여 영업정지되거나 문을 닫는 저축 은행들을 인수하였고 그래서 생겨난 곳이 ** 저축은행이었습니다.


인수합병 실사팀에서 늦은 밤까지 근무할 때도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어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2002년에는 결혼도 하고 진급도 하면서 저의 삶은 이대로 탄탄대로 인줄 알았고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만 살아갈 줄 알았습니다.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의 모든 것이 추락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전혀 못했습니다. 2003년 PF심사팀에 근무할 당시 직장 선배의 거래처에서 신축 지원 자금 대출을 부탁하였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대출을 실행하였습니다. 저는 배임수재죄라는 큰 벌을 받게 되고 이 사건으로 인해 3년이라는 세월을 **교도소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결국 가정도 파탄나고 이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200*년 *월 출소 후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적응하여 정상적으로 사회 구성원이 되고자 노력하였으나 전과자에게는 세상의 문이 참 좁았습니다. 일반 회사에서는 저를 받아주지 않았고 취업을 할 수 없어 막막하던 중 200*년 아는 선배에게 부탁해 선배님의 음식점에서 야간에 직원들 퇴근 시켜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2년 정도 일하던 중 선배님이 가게를 팔게 되면서 이곳을 그만 두고 낮에는 경남 양산 소재의 고물상에서 1톤 트럭을 운전하는 일을 하였고 밤에는 친구가 운영하는 부산 **동 소재 레포츠센터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돈을 모아 예전에 금융기간에 있던 빚을 정리, 금융공사 및 신용정보 회사와 협상하여 변제하였습니다. 변변치 않은 수입으로 정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다 정리 할 수 있어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더 이상 지인분들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될 것 같아 조금 모아두었던 돈과 빌린 돈으로 권리금이 저렴한 노래방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제 이름으로 된 첫 사업장이었기에 매일 청소하고 정성껏 관리하였으나 매달 적자의 연속이었고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데 왜 이렇는지 밤에 혼자 울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건물주가 재건축을 한다고 장사 하던 곳을 비워 달라고 하였습니다. 힘들게 마련한 돈으로 처음하는 내 사업장인데 결국엔 권리금으로 들어간 돈 4천만원을 다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사하면서 생긴 빚에 매일매일 들어가는 일수 대출에 극도의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손해를 많이 보고 빚이 많이 생겼지만 가게를 비워드렸습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했기에 아는 지인에게 부탁해 망고를 트럭에 싣고 나가 판매를 하였습니다. 열심히 했지만 빚을 갚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매출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거제도 아파트 현장에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아파트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많은 빚을 갚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생각보다 일이 없어 쉬는 날이 많아지면서 숙소인 원룸에서도 나와야만 했습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공사 현장에 인부를 구한다고 해서 제주도까지 내려가 하루 일당 10만원을 받고 1년 정도 일을 했습니다. 비가 오면 일을 못하는 날이 빈번해 제 수입으로 대출이자 및 원금을 정리하기 힘들었지만 최대한 돌려가면서 정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2016년 예전 건물주로부터 상가가 완공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고 가족들과 의논 후 여동생 소유의 집을 담보대출 받아 마지막으로 인테리어하고 가게 운영 잘해서 앞전 손해 본 돈하고 빚도 갚고 다시 달려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장사는 계속 적자였고 시집간 여동생 집이며 부모님이 거주하고 있는 유일한 집을 경매로 날릴 수도 없었습니다. 저축은행과 사금융 현금서비스, 카드론으로 대출을 돌려 막다 보니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201*년 12월 아버지께서 폐암 4기 판정을 받으셨고 일도 못하시게 되셨습니다. 아버지는 월남 참전 유공자로 오랜 세월 살아오시다가 이번 병환이 고엽제로 인한 폐암4기 판정으로 국가유공자 3급으로 변경되셨습니다. 아버님의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인하여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자원 사업체를 바로 정리할 수가 없어 202*년 5월 사업장 임대 계약만료시까지 아들인 저에게 사업장 마무리를 당부하셨습니다. 적자만 발생하는 저의 가게를 정리하고 아버지 사업장인 고물상에서 파지 수거 일을 하고 있습니다.

1톤 트럭으로 아파트 신축 현장의 파지를 수거하는 일로 중국으로 인해 재활용 수출이 어려워져 파지 단가가 계속적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파지를 주워서 빚을 갚으려고 해도 고금리의 저축은행, 사금융의 빚을 돌려 막다보니 매일, 매월이 불안의 연속이며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교도소 출소 후 12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성실히 일을 하였지만 몇 번의 장사 실패와 많은 부채로 인하여 현재까지 빚을 돌려 막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 이상의 대출도 불가능하여 어머님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이자와 원금을 돌려 막다보니 저 하나로 인해 온 가족이 빚더미에 있습니다. 빚을 졌으면 당연히 상환하여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실천해 왔습니다. 수입이 생기면 빚만 갚고 밥만 먹고 살자라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오히려 늙고 병드신 부모님께 얹혀 사는 못난 놈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이번 한번만 다시 뛸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앞으로 빚을 내서 살아가는 일은 없도록 성실히 살아보겠습니다.

현재 아버지의 사업장은 폐암 4기로 인해 아버지가 계속 운영을 못하시게 되면서 오늘이라도 당장 사업자를 폐업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년 5월 임대차 만기일까지 저에게 위 사업장의 정리를 부탁하셨습니다. 단가의 하락으로 영세한 고물상은 영업 운영비도 감당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때까지 파지 수거하여 판매한 돈으로 영세한 고물상 운영과 저의 빚진 부분의 대출이라도 갚을 수 있도록 해보라는 하셨지만 이제 그 수입마져 불투명하게 된 현실이 너무나 힘겹습니다. 파지 수거 일은 계속 줄고 있고 판매단가가 계속 떨어지니 최악의 상황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파지수거를 못하게 되어 실업자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모든 문제가 폭발하기 전에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던 중 카***이라는 출장 스팀세차를 창업하게 되었습니다.

201*년 *월 29일 개업하여 1년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금 현재 수입은 얼마 되지 않지만 영세한 고물상의 주 수입원인 파지수거도 이제 곧 정리되게 될 것이라 출장스팀 세차라는 힘든 육체노동이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빚만 가진 저는 육체와 정신이라도 건강하니 성실히 해서 갚아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